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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 퀴즈에 나오신 두봉 주교님

     

    얼마 전에 우연히 유 퀴즈 온 더 블록이라는 프로그램을 보게 되었습니다.  거기에 두봉 주교라는 분이 나오셨는데 94세의 나이신데도 밝고 온화한 미소를 짓고 계셔서 어떤 분일까 하고 시청했습니다.

    두 봉 주교님은 1929년 프랑스의 오를레앙이라는 곳에서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그곳은 잔다르크가 지켜낸 마을이라고 합니다. 

    두 봉 주교님이 현재 살고 계신 곳은 경상북도 의성군입니다. 주교님은 26살에 한국으로 오셨고 경북 의성에서 70년째 살고 계십니다. 한국에 오래 사셔서 한국음식을 더 많이 드셨다고 합니다.

     

    • 유재석 : 한국에는 어떻게 오시게 됐는지요?

     

    • 두   봉 : 저를 천주교 '주교'라고 부릅니다.  (주교: 가톨릭에서 교구를 관할하는 성직자)  신부가 되면서 지원을 했습니다. 해외로 선교하러 가겠다고... (파리 외방 전교회에서 선교사로 한국에 발령)   6.25 전쟁이 발발했을 때 제가 조국에서 1년간 군 생활을 했습니다.     (당시 프랑스 측에서는 6.25 전쟁에 파병을 하기로 결정하고 지원자를 모집하였다)   그때는 제가 신부가 되고 싶어서 신학대학을 다니고 있었기에 지원을 안 했지만, 제 친구 중에 아주 친한 친구가 파병 지원을 해서 한국에서 전사를 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한국에 대해서는 참 관심이 있었습니다.  휴전은 1953년 7월이었거든요 제가 한국으로 발령을 받은 게 6월이었습니다.  전쟁 중인 나라로 사람을 안 보내거든요.  뜻밖에 한국으로 발령받아서 얼마나 좋았는지 몰라요.  더구나 그때 한국이 참 무척 어려운 나라였어요. 무척 도와줘야 하는 그런 나라였는데 딱 그 나라로 가라고 그러니까...

    • 세   호 : 저라면 왜 그 어려운 나라에 내가 가야 할까' 이렇게 생각할 거 같아요..

     

    • 두   봉 : 선교사가 어려운 나라로 가고 싶지 잘 사는 나라로 가고 싶진 않거든요. 가장 어려운 나라로 딱 한국으로 가라고 그랬으니까 '무척 좋아했어요' (두봉 주교님은 배를 타고 두 달 반을 걸려 한국으로 오셨다고 합니다)

     

    • 유재석 : 스물여섯 두봉의 눈에 비친 대한민국은 어땠나요?

     

    • 두   봉 : 비참했다고 이야기글 할까요, 말이 조금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요. 그래도 아주 참 첫 번 느낀 것이 상황이 좋지 않았지만 한국 사람들이 좋게 보였어요.  "사람다운 사람"  처음부터 한국사람이 풍기는 인상이 좋았어요.  적응하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었어요. 서양 사람이라고 그러면요 아주 좋은 데서 살다가 그렇게 온 사람으로 보기가 쉬운데.  제가 열 살 때 제2차 세계대전이 터졌어요.  제가 전쟁을 겪어본 사람입니다.  폭격도 피하고 피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제가 중고등학교 때 먹을 것이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어요. 저를 보십시오 제 팔이 1m 80cm예요. 키는 1m 60cm요. 중고등학교 때 먹지 못했기 때문에 그러는 거예요. 정말 먹을 것이 없었어요. 그래서 고생을 안 해본 사람이 아니에요.

    • 유재석 : 그 당시에 언어 때문에 힘들진 않으셨습니까?

     

    • 두   봉 : 아 그렇죠 그러니까 한국말을 배워야 했죠.  한국말을 공부할 수 있는 학교가 없었어요. (주교님 책장에 아주 오래된 한국어 사전이 있는데 너무 오래 보셔서 이게 다 해졌다고 합니다.)

     

    • 유재석 : 주교님이 이렇게 한국에 오셔서 하신 일들이 굉장히 많다고 들었습니다.

     

    전쟁 후 가난으로 대전 선화동 다리 밑에서 생활하던 청소년 50여 명을 거두어 나중에 집으로 돌려보냈고, 한국 최초 전문대학인 상지여자전문대학교와 상지여자중학교를 설립, 농민 인권신장에 힘써 '농민 사목의 대부라 불렸고, 경북 영주에 한센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설립하였다.

     

    • 유재석 : 한국에 처음 와서 보좌신부 시절에 겨울에도 난롯불을 피우지 않고 양말도 신지 않고 절약을 하실 정도로...

     

    • 두   봉 : 그건 지나친 이야기예요 허하 허하. 불 때기가 좀 어려웠었거든요. 그래서 겨울이면 뭐 불 많이 때는 것보다 우선 양말을 쓰고 내복을 쓰고. 어릴 적부터 어렵게 살았기 때문에 이렇게 낭비하는 것을 좀 꺼려요, 싫어해요. 아주 평범하게 살고 싶어요. 평생 평범하게 살았어요. 그래도 행복해요.

     

    • 세   호 : 너무 작아지는 것 같습니다... 솔직히 (천주교도 중에서 물욕 제일 심한 편) 

     

    • 두   봉 : 욕심을 부리기 시작하면 사람이 한이 없어요. 좀 평범하게 살면 평범한 것으로 만족해요.

     

    • 재   석 : 주교님께서 농민분들을 돕다가 추방당할 뻔한 일도 있으셨다고요?
    안동교구 가톨릭농민회 사건                                                                                                         
    1979년 안동 지역 농민인 오원준 씨가 군청에서 보급한 불량 씨감자에 대해 항의했다가 경찰로부터 납치, 고문을 당한 사실이 드러나면서 농민들이 가톨릭농민회와 연대하여 투쟁했던 사건

    투쟁의 중심에 있었던 두 봉 주교

    • 두   봉 : 참 옛날이야기인데... 박정희 전 대통령 때였어요. (공업 중심의 경제 개발) 전 농민들 편이었어요. 경찰관들이 우리 집을 습격해서 나가라고 추방명령을 받았어요. 제가 교구장으로 있었던 입장이었는데 교황님께서 교구장을 임명하시는 거예요.

     

    • 재   석 : 그 당시 교황님께서 요한 바오로 2세...

     

    나라에서 주교를 추방하려면 교황청이 수락해야 가능했다.
    바티칸에 모인 요한 바오로 2세, 김수환 추기경, 윤공희 대주교, 두봉 주교,
    유신정권 당시의 한국 농민들이 처한 상황과
    두봉 주교의 추방 명령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눈다.

     

     

    • 두   봉 : 서울 교구장이 김수환 추기경님이었습니다.  (김수환 스테파노 : 한국 최초의 추기경)  교황님 사무실에서 우리 한국 상황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했더니,

    교황曰  교회 측에서 어려운 노동자, 어려운 농민들 편을 드는 것을 찬성할 수밖에 없다.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며 추방을 불허하고 한국 정부에 이야기함.

     

    • 두   봉 : 그래서 이제 한국에 들어올 수가 있었고. "어쨌든 떳떳하게 살았어요. 기쁘고 떳떳하게!"

     

    • 재   석 : (많은 걸 느낀듯한 유재석 표정) 약간 소름 돋았어요 제가 지금, 떳떳하게 살아왔다고 수많은 분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지. 저는 솔직히 떳떳하게 살지 못했습니다...

     

    • 세   호 : 저는 주교님이 지금까지 얘기하신 것 중에 단 한 개라도 할 수 있느냐고 물어본다면, 저는 할 수 없습니다.라고 얘기할 것 같아요. 진짜

    • 재   석 : 주교님, 어떻게 사제가 되셨습니까?

     

    • 두   봉 : 우리 집은 천주교 집안이었어요. 아버지, 어머니가 모범 신자였어요.  우리 아버지가 성당에서 누군가에게 어려움이 있으면, 그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거예요.  

    아버님께서는 주교님이 한국에 오신 후에 매주 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다시 못 들어올지도 모르는 아들을 한국에 바치는 입장에서 아들에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편지를 보내는 것뿐... 아버님께서는 90이 되시던 해까지 32년간 매주 편지를 보내셨다고 합니다.

     

     

    아버님께서 보내신 마지막 편지...
    친애하는 나의 작은 르네 야.
    이곳은 너무 축축하고, 네가 있는 곳은 너무 메마르구나.
    있는 대로 살아야지
    나는 어둡고 흔들리는 외로움 속에 서서 편지를 쓰고 있단다.
    여긴 비가 너무 많고 한국에는 비가 너무 적다고 이야기를 들었는데
    하늘에서 주는 대로 받을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 집이 이토록 활발한 집이 되었다. 너의 큰누나가 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참 고맙게 생각되는 것이 대청소하고
    사위가 텃밭 다 정리를 해주어 고맙다, 
    그 덕에 둘째 누나가 조금 쉴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이제 대소변도 컨트롤하지 못한다.
    그래서 둘째 누나가 매일 와서 닦아주고
    그리고 먹을 것을 주니까 무척 고맙다.
    • 두   봉 : 둘째 누나가 우리 집에서 3~4km 정도, 매일 아침에 제 식구들에게 아침 준비를 해주고 그다음 자전거로 아버지를 찾아왔어요. 아버지에게 식사를 해주고 점심 주고 그런데...  그래서.. 참 이 편지를 나도 아주 귀히 여깁니다...

     

    • 재   석 : 여기 안동(ANDONG) 이렇게 쓰여 있네요.

    • 두   봉 : 아버지가 매주 나한테 편지를 보내시고 제가 아버지께 두 주, 15일마다 편지를 보냈어요.  나이가 그렇게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억지로 이렇게 일어서서 그래도 억지로 마지막 편지를 쓰신 것을 보면 감동이 돼요.. 감동이 돼요... 이 편지를 쓰실 때가 아버님이 구순, 구십네 살에 세상을 떠나셨거든요, 그래서 이제 제 나이인데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그래도 계속해서 저한테 편지를 보내야 되겠다. 그다음부터는 일어서지 못했기 때문에 편지를 못 썼습니다만... 얼마 후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엄마가 세상을 떠나셨을 때는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고 제가 엄마를 봤고요. 근데 아버지는 세상을 떠난 다음에 찾아갔어요.  참 고맙기 짝이 없죠.  그렇게 사신 그분처럼 나도 이렇게 살아야 하지 않겠는가.  억지로 그렇게 사는 거 아니에요.  아버지가 그렇게 사셨기 때문에 나도 잇따라 그렇게 마땅히.  "기쁘고 떳떳하게 살아요. 아버지가 그랬기 때문에.  

     

    • 재   석 : 주교님 오늘 직접 뵙고 이렇게 얘기를 나누고 있습니다만, 아 이게 참 오늘 또 많이 느끼고 배웁니다.

      '떳떳하게 살았다'는 이 말이 굉장히 여운이 가네요.

     

    못다 한 이야기...

    두 봉 주교님이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

    아빠,
    아빠 고마워요 어떻게 고맙단 인사를 행 좋을지, 아빠가 하늘나라에서 행복을 누리고 계실 텐데 그때 나에게 보낸 편지를 지금도 이 사람들에게 소개했는데, 아빠도 하늘나라에서 좋아하실 거예요.  내가 아빠 엄마로부터 사랑을 그렇게 많이 받았다는 것을 고마워요.  이 편지를 30년 동안 계속 보내신 거 고마워요.
    난 아빠 엄마 너무 좋아. 고마워요.
    하늘나라에서 정말 기쁘게 영원히 행복하게 사실 거예요.
    나도 언젠가 따라갈 거예요
    따라갈 때까지 돌봐주시고 
    그다음에 함께... 고마워요 고마워...

    두 봉 주교님 처음 알게 되었는데, 너무 아름다운 분이라는 생각이 드네요. 그리고 제 삶에 대한 반성도 하게 됩니다.

    두 봉 주교님을 본받아, 저 또한 떳떳하고 기쁘게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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